 |
| LLM이 공급망 에이전트들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며 재고 주문을 판단하는 구조. (출처: Quan et al., InvAgent, arXiv 2024) |
물류업계는 지금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창고와 운송의 물리적 자동화를 넘어, 이제는 언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공지능, 즉 대형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이 물류 시스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이 직접 판단하던 수요 예측, 재고 관리, 공급처 응답 등 복잡한 업무가 이제는 LLM을 통해 지능적으로 자동화되고 있다.
중국 하얼빈공과대학교의 최신 연구에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제시됐다. 이들이 개발한 ‘InvAgent’라는 시스템은, 별도의 사전 학습 없이도 실시간 상황에 맞춰 적절한 재고 주문과 공급을 조율하는 AI다. 과거처럼 "이 상황에는 이 규칙을 써라"라는 코딩 없이, 자연어 기반 질의와 내부 데이터를 활용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SCM 소프트웨어와는 궤를 달리한다. 연구진은 이를 “제로샷(Zero-shot) 기반의 공급망 지능화”라고 표현하며, 향후 반복적인 수요 변화 대응에서 특히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다른 연구팀은 LLM이 단순 조언 수준을 넘어 전략적 의사결정 도구로 발전할 수 있음을 실증했다. 그들은 LLM 기반 SCM 에이전트에게 가상의 공급망 게임(Beer Game)을 맡겨 보았고, 놀랍게도 기존 인간 플레이어보다 재고 손실과 주문 왜곡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실험은 단순히 언어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LLM이 공급-수요 간 복잡한 피드백 구조까지 파악해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현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글로벌 물류 솔루션 기업들은 최근 LLM을 활용해 운송서류(BL/BOL)의 자동 분류·입력 기능을 상용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사람 손으로 일일이 입력하던 내용을 AI가 스스로 읽고 구조화해, 수 분 걸리던 작업이 수초 내로 단축되는 식이다. 일부 기업은 LLM을 활용한 대화형 AI로 고객 대응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며, 배송지 변경, 운송 지연 문의, 계약 검토 등 반복적인 업무 부담을 크게 줄이고 있다.
한편 LLM은 리스크 관리 분야에서도 주목받는다. 2025년 초 한 연구진은 LLM을 활용한 물류 허브 위험도 평가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 시스템은 지정학적 리스크, 날씨, 교통 혼잡, 재고 흐름, 금융 지표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물류 거점의 안정성을 실시간으로 판단한다. 이는 신규 물류 센터 구축이나 기존 인프라 보강 시 전략적 판단에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과제도 존재한다. LLM 기반 SCM 시스템의 성능은 무엇보다 입력 데이터의 품질에 달려 있다. 잘못 분류된 재고 코드나, 일관되지 않은 현장 데이터는 AI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또한, 공급망 데이터는 기업 기밀에 가까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프라이버시 보호와 보안 체계 확보가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현장 직원들이 이 기술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디지털 이해도와 협업 체계의 개선도 뒤따라야 실효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계는 LLM을 미래형 공급망의 핵심 엔진으로 주목하고 있다. 단순한 챗봇을 넘어, 문서를 읽고 판단하며, 공급처에 적절히 요청하고, 위험도를 스스로 분석하는 AI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에는 디지털 트윈, 블록체인, IoT와 결합하여, 예측과 대응을 모두 자동화하는 완전 자율형 공급망 시스템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크다.
이제 물류는 단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말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