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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안전대책 사각지대에 놓인 정신질병 사망, 구조적 대책 시급

‘보이지 않는 재해’로 남은 정신질환…산업현장의 근본적 전환 필요
2025년 현재 한국의 산업현장은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물리적 사고 사망률은 눈에 띄게 감소했지만, 그 이면에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또 다른 통계가 조용히 쌓이고 있다. 산업안전보건공단(KOSHA)에 따르면 지난해 업무상 정신질환으로 인정된 산재 사망자는 1242건으로, 5년 전보다 약 130% 증가했다. 특히 콜센터·물류·공공행정·의료업종 등 감정노동이 잦은 직종에서 두드러졌다.

문제는 이러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재해”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작업장 내 안전기준, 유해물질 노출, 설비 위험 등을 규정하지만, 정신적 위험요인에 대한 정의나 관리 의무는 부재하다. 현장의 상담사나 정신건강 전문인력 배치율은 전체 사업장의 27%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그마저도 대기업·공공기관에 편중되어 있다.

서울 소재 한 대형병원 산업의학과 교수는 “장시간 근무, 고객폭언, 직장 내 괴롭힘 등은 명백히 직업성 스트레스 요인이지만, 제도상 안전관리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결국 노동자가 스스로 견디다 한계에 이르러야만 문제가 드러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노동건강연대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질환 산재 사망자’의 60% 이상이 상담이나 치료 이력 없이 사망 직전까지 근무를 이어갔다.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관리자나 동료가 이상징후를 인지하더라도 체계적으로 보고하거나 지원할 통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사망 후에야 원인이 밝혀지는 산재”라는 씁쓸한 평가가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체 재해는 경보음이 울리지만, 정신 재해는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고 경고한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 관계자는 “정신질환은 은폐되기 쉽고, 초기 개입이 어려워 사망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산업안전보건체계가 정신건강을 별도 영역이 아닌 ‘노동안전의 일부’로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정부는 내년부터 ‘근로자 정신건강 통합관리 시범사업’을 통해 고위험 업종(콜센터·운수·보건복지 등)에 정기 심리평가와 전문상담 체계를 도입할 계획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여전히 “법적 강제력이 약하고, 예방보다 사후대응 중심”이라고 우려한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예방조치가 권고 수준에 머물러서는 현장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안전관리자처럼 ‘정신건강관리자’ 제도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노동의 구조’에 있다. 과로와 감정노동, 불안정 고용이 결합된 환경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플랫폼노동자나 파견직 근로자에게는 정신건강 관리조차 사치일 수 있다. 서울시립대 사회복지학과 박정우 교수는 “정신질병 사망을 개인의 심리문제가 아닌 구조적 산재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하다”며 “일터가 사람을 소모하지 않도록 법·제도·문화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안전의 패러다임은 ‘위험을 피하는 일터’에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일터’로 옮겨가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해를 외면한 채 “안전이 개선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신질병 사망이라는 사회의 침묵한 통계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는 명확하다. 이제는 안전의 기준을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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